남상화 × 장수미 공개 편지: 우리는 정동 속에 있다 ➀

장수미와 남상화는 지난 7월 정동(Affect)을 키워드로 한 서울무용센터의 렉쳐 프로그램 <몸들의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콜렉티브 움직임>에 공동 참여했다. 렉쳐를 어떻게 기록하면 좋을지 생각하다,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것보다 이 이벤트가 파생시킨 변화와 잔상을 기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공개서간문의 형태로 다시 만났다. 편지글은 8월 한 달에 걸쳐 서울과 베를린 사이를 세 차례 오고 갔다. 한 사람이 먼저 보내고 이에 답장하는 방식이 아닌, 동시 발송을 원칙으로 했다. 말 걸기와 답하기가 동시에 이뤄지는 가운데, 서로 얽히고설키며 갈래가 갈리기도, 결을 같이 하기도 했다.

웹진 <춤:in> 9월호에서는 장수미와 남상화가 주고받은 총 여섯 편의 편지를 세 차례로 나누어 매주 수요일 3주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공개서간문은 이미 또 다른 수신자를 내포한다. 그 잠재적인 자리에 함께해 준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첫 번째 편지

수미에게

안녕하세요, 수미!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베를린의 한 극장이었어요. 임지애 안무가의 공연이 끝난 직후였죠. 당신은 ‘외부의 눈’으로 그 작업에 참여했어요. ‘눈’이라는 타이틀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주변을 살피는 당신은 빛이 났지요. 그로부터 며칠 뒤 다시 당신을 만났어요. 극장 소피엔잴레(Sophiensaele), 같은 장소에서 말이죠.

탈식민화(Decolonization) 담론과 실천을 다룬 <애프터 유럽(After Europe)> 기획전이 열린 날이었어요. 심포지엄이 끝나고 다음 공연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지요. 당신은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꺼내며 말했어요. 사람을 찾고 있다고. 춤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나는 답했지요. 나는 춤을 잘 몰라요. 모르기에 지금 이렇게 몰두해 있어요. 그러니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대화 파트너가 되고 싶어요.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문턱을 넘어서게 한 것은. 당신이 꺼내든 도시락 밥통이었는지, 어미를 흐리지 않는 당신 특유의 말소리였는지, 저는 당신의 춤을, 당신과 춤을 이야기하고 싶어졌어요. 하긴 반갑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오래전 광고 속 “키스를 글로 배웠습니다”도 아니고! 춤을 글로, 그것도 독일어로 공부하고 있는 처지에 말이에요.

하지만 그날 이후 우리의 대화는 당신의 춤이 아닌 저의 춤으로 이어졌어요. 한국을 떠나기까지 한 번도 훈련받은 적 없는 몸인데, 어쩌다 보니 저는 베를린에서 공연을 하고 있네요. 그 자리에 당신은 관객으로 함께 해줬어요. 당신은 평생 춤을 추고 춤을 만들어 왔지만, 그때까지 저는 당신의 공연을 본 적이 없었어요. 참 아이러니하지요. 무대와 객석의 자리가 뒤바뀐 댄서와 넌(non)댄서의 만남이 제게는 특별합니다. 당신이 먼저 손 내민 수평적 연대와 당신이 보여준 존중에 감사드려요.

다시 우리가 나눈 첫 대화의 순간으로 돌아와서, 저는 이렇게 고백했어요. “안무하시는 분들 정말이지 철학자들 같아요.” 그러니 몸이 하는 일을 언어화하는 일, 내가 하는 춤 공부라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다고 생각했어요. 뭐, 괜찮아요. 살면서 익숙하게 대면해온 것이 실패이니까요. 이제는 그 미끄러짐을 나름 즐기고도 있으니. 하지만 미끄러짐도 마주침이 있어야 생기는 법. 짧은 순간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춤과 저의 공부가 만나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요. 앞으로 주고받을 편지 가운데 발생하게 될 사건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를 인용해 봅니다.

“타자들이 당신의 잠재라는 선물을 받을 때, 그들은 그 선물을 당신이 스스로는 취할 수 없었던 자리에 놓습니다. –그런 다음 당신이 혼자서는 갈 수 없었던 곳으로 갈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 작동할 때, 무용수는 철학 텍스트로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준비했다고는 결코 생각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요. 그리고 철학자는 개념을 운동으로 번역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 그것은 사건이라 부를 만합니다. 사건들은 항상 초개체적이고, 잠재들을 불러옵니다. 그것은 개체적으로는 결코 도달해 볼 수 없었던 것이죠.”

-《정동정치》, 248p

첫 번째 편지를 쓰면서 우리의 우연한 마주침을 되돌아본 이유는요. 최근 서울무용센터에서 진행된 정동 관련 렉쳐의 여운 때문이에요. 팬데믹으로 가속화된 댄스 필름으로의 전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는 마지막 질문에 당신은 최근작 <퀴어링 보이스> 작업 과정을 공유했지요. 그리고 다른 매체와의 만남, 신체와 사물의 수평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영상 연출을 맡은 신빛나리 감독은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식으로 말해 동맹을 늘려라”라고 답한 바 있어요.

<퀴어링 보이스>의 영상을 떠올립니다. 타이핑, 목소리, 생각들…, 카메라, 음향, 퍼포머…, 복싱 글러브, 금속판, 유리벽… 그러니까, 몸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포함하는 모든 몸이 서로의 진동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며 움직입니다. 그 움직임이 감동을 줍니다. 카메라와 함께 숨죽인 몸도, 분할된 화면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차도 그 자체로 춤이 됩니다. 퀴어(Queer)는 독일어 ‘quer:가로지른’에서 나온 말이라잖아요. 저는 퀴어를 하나의 정체성이 아닌, 정해진 카테고리 안에 머물도록 강요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실천으로 이해해요. 수직의 질서를 가로지른 몸짓으로. 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발생한 퀴어링 보이스는 어딘지 당신이 제게 건넨 수평적 연대와도 닮아 보입니다

이 편지를 당신이 받게 될 때면 나도 당신의 편지를 읽고 있을 겁니다.
각자 집중한 가운데 드러나는, 연결되어 있음. 그리고 세심한 터치 속 강력한 펀치를 기대합니다.
개체적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갈 사건을 기다리며.

2021년 8월 첫째 주
베를린에서 상화가

상화에게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까요… 해내는 기억보다, 깊이 들어간 생각보다, 그냥 지금의 나 그대로 이 글을 읽을 사람의 동공을 만지고 싶은데요. 그리고는 전이되는 작은 숨들의 움직임을 느끼고 싶고요. 왜냐구요? 아직은 시작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음… 만진다는 것(Touch)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느낌이자 기술인 것 같고, 내 손으로 어떤 몸의 살을 만지지 않는 이 만짐은 어떤 만짐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러다 보면 어떤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요.

난 종이에 인쇄된 검은 글자들을 만지면서 책을 읽은 적이 있었어요. 기억에는 <Immaterial Bodies>였던 거 같아요. 그때는 사변적 감각, 사물(Thing)과의 접촉, 정동적 사물 뭐 이런 그럴듯한 말보다 ‘몸이/몸의-기능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의심하고 있었거든요. 어쩌면 제대로 된 짝을 짓는 것을 거부했는지도 몰라요. 눈은 읽고 귀는 듣고 머리는 이해하고 손은 만들고 마음은 느끼고 하는, 몸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고장이 나 있었고, 그 고장이 기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새로운 일(Work)을 하게 하는 고장 난 일상을 사는 거예요. 환각(Illusion) 같은 현실 경험과 함께하고 있었거든요. 꽤 괜찮은 경험이었어요. 이 정도면 나의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무엇을 만지고 어디로 만지고 무엇을 느끼고 어디가 움직이고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생각하는지… 관심을 끌 만한 미끼가 던져졌는지 모르겠지만, 난 정신 차릴 수 없는 생활(완전한 수동형) 그 자체를 실험하고 있음은 여전히 틀림없어요.

그 중 어느 날을 잡아 올게요!

어제의 나는 서울무용센터의 2021년 프로그램인 “CO-Choreo Lab”에서 한 젊은 작가의 멘토로 함께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예술, 여자, 경계, 노마딕(Nomadic), 메소드(Method), 북아메리카, 인종차별, 한국사람, 언어, 몸, 스튜디오 프랙티스(Studio Practice), 두려움, 국경, 베를린, 공연의 좋은 것, 폼(Form)은 통과하고, 쉐이핑(Shaping)을 향해 움직이는, 서사, 느림, 아트-마켓 지리학, 동양 여자, 믿음 등의 언어들에 붙어있는 거친 살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습니다. 누군가 내 말을 듣고 있으면 말을 하는 나의 일부는 뼛속까지 진동하는 감각으로, 어느 때는 여느 공연 스크립트에 있을 법한 말들로, 우뇌와 좌뇌를 횡단해 가며 그때의 적절한 언어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또 다른 일로 바쁜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녀의 마스크 위에서 움직이는 동공과 그 주변의 허공을 오가며 바라보고, 말소리와 함께 응축되었다 펴지는 미간의 사실(Fact)과 가능성(Speculation)을 타진하며, 서울과 베를린의 사람과 사건들을 떠올리며, 나의 목소리에 지속적인 반응을 해나갔습니다. (얼마 전까지 상화와 줌을 통해 이야기할 때가 기억이 납니다) 

작가는 나에게 묻습니다.
“작가님을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이 질문에 나는 어느 시점을 생각해야 할지 길을 잃었습니다. (이주일 수도 있고, 춤일 수도 있고, 판단일 수도 있고, 개인의 역사일 수도 있고, 충동일 수도 있고, 원인이자 결과일 수도 있는 움직임!) 이 ‘움직임’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방대하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기에, 감각을? 경로를? 아니면 동기를? 마음을? …숨을 머금고 잠시 이렇게 헤매다가 나는 되물었습니다.

“나의 예술-인생-궤적(Trajectory)에서의 움직임을 말하나요?
아니면 유럽과 한국을 오가는, 대륙을 오가는 움직임?”
그리고는 그녀의 답을 듣기도 전에 “흥미로움(Interest)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하고싶은것!?
!!!    ???    !!…
다른 말로 하면 ‘하!   고!   시!    푼 것’인데… 나의 유럽 프로페셔널-라이프(!)에서 받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인 “What  do    y o u    want?”, “What’s  y o u r    interest?”는    나에게 정말 부담스러운 질문이었다. 빠른 지각과 빠른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 같은 느낌.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 질문이자, 아주 오랜 시간을 프로세스(Process)하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interest’ 흥미로운 관심있는… 이미 하고 있는데, 이거라고 답하면 되는데, 근데 이것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하지? 그것도 왠지 섹시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예술가잖아! 예술성을 좌우하는 알고 있는 지식과 가장 직관적인 것. 그것… 내 느낌에는 배꼽 밑의 똥창으로부터 전이되는 전자파동 같은 것인데 찾으면 명확하지 않고, 사라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문득 큰 목소리로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고, 뒤돌아보면 해왔고, 그래서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이것저것 연관된 사연들이 너무 많아서, 마치 의미가 장착된 장총 같기도 한 것. 시간이 장전되어 있고 당기면 터질 것 같은 것.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
‘흥미로움(Interest)’, 이건 온라인 사이트를 아주 가볍게 넘겨보는 소소함일 수도 있는데, 너무 의미를 담는 것은 아닌지… Ich fühle mich so eine Bedeutungsschwanger(배부른 산모)!

상화, 근데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충동’ 혹은 조금 소프트(Soft)한 단계로 보면 ’정동’ 일수도 있는 것 같은데 상화의 감(感)은 나와 함께 가고 있나요?

상화의 렉쳐 때 나누었던 토마스 하우어트(Thomas Hauert)의 안무에 있는 즉각적인(Immediate) 움직임 기술인 그것들(Some Moment~, Somehow~, Something makes me move, Some from inside, Between some stimuli of out side, To be with some), 내적 충동과 외부의 자극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 이 움직임들이 각각 다르게 발생하며 서로 함께하는 것에 상화도 나도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상화와 나는 ’창발’이라는 말로 자주 이야기한 것 같아요. 왠지 이 창발적 움직임이 ‘흥미로움’이라는 말보다는 나의 인생 궤적(Trajectory)에 좀 더 굵직한 다이내믹을 더해 주는 것 같은데, <어코즈(Accords)>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무용수는 이런 내외적 상관관계에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이 즉흥의 테크닉을 흥미의 감각이라고 부르면 그저 좋을 것 같은데, 그 움직임 안에서 있어야만 하고 아직은 모르는 불안정의 시간과 공간에 몸을 맡기는 불안-믿음의 감각이라면 그것이 상상되나요? 이것은 무엇에 대한 테크닉일까요? 상화는 무용수가 되어 이러한 감각을 경험해보고 싶은가요? 이것이 인생의 궤적을 만들어가는 창발의 은유라면 이미 그 움직임을 몸으로 기록하고 있나요? 

사실 나는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 나 자신이 처음 정동(Affect)이라는 언어를 만난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난 시점에 대한 감(感)이 어제보다는 멀었는지 잘 다가오지 않네요. 아니면 이 비선형적 시간을 오가는 즐거움을 이 편지로 공유해보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혹은 언어에 기댄 감각적 만짐을 어떻게 안무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것이 우리의 협업적 움직임일 것 같다는 느낌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순간 자판 위의 손가락 끝의 살갗과 손톱 사이의 간격이 오물거리는 입술의 움직임과 중첩되면서 상화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상화의 글을 보는 게 기대되네요.

2021년 8월 첫째 주
서울에서 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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