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화 × 장수미 공개 편지: 우리는 정동 속에 있다 ②

두 번째 편지

수미에게

바이센제(Weißensee), 집 앞 호수공원을 걷고 있었어요. 긴긴 겨울에 대한 보상일까요, 베를린의 여름은 눈이 부시죠. 집채보다 큰 나무들이 뿜어대는 초록 냄새, 쨍한 하늘, 빛에 반사된 채 출렁이는 물결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분명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하긴 한데, 그 냄새는 아닙니다. 한여름의 더위가 스러질 때 느껴지는 안도감,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한 세계가 물러설 때의 쓸쓸함이 지금 여기, 이 바람에는 묻어나지 않습니다. 가을의 설렘도 지독한 여름을 견뎌냈을 때만 찾아오는 선물이었나 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에 쥔 핸드폰으로 당신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이 편지가 저를 오랜만에 뛰게 합니다. “편지를 써보자” 우리가 만든 이 작은 규칙이 이렇게 큰 파동을 불러일으킬 줄 몰랐습니다. 당신을 생각하고 이름을 부르고 편지를 기다리는 제 모습이 좀 당황스럽네요. 이런 저의 숨을 느끼고 눈동자를 만지고 싶으시다고요? 켁! 저는 지금 고백도 하기 전에 들킨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   말처럼   흥미의   감각이라고   부른다면   좋았을   것을요.   우리는   그것을 정동(Affect)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규칙은 간단해 보입니다. ‘이웃의 속도와 방향에 맞춰 움직여라. 너무 가까이는 말고! 간격을 유지하면서!’, ‘앞에 있는 사람을 따라 움직여라.’ 그러자 몸들은 서로 정동하고 정동되는(affect and be affected) 가운데, 뒤엉키다  펼쳐지고,  밀려왔다  흩어지고,  멈칫했다  도약하며,  끊임없이  새롭게 변해갑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지금   토마스   하우어트(Thomas Hauert)의 <어코즈(Accords)>의 한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새떼 같기도 하고, 물고기떼 같기도 한 움직임을요. 

작년 여름방학 과제로 안무에 나타난 새 떼 같은 움직임(Swarm, 이하 스웜)에 대해 정동 이론을 빌려 글을 쓰고 있다고 했을 때, 당신은 말했지요. “스웜은 군중(Mass)과 달라요.” 이보다 더 중요한 지적은 없을 거예요. 스웜은 매스 게임(Mass Game)같은 획일화된 전체가 아니죠.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할 필요도, 외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몸을 끼워 맞출 필요도 없어요. 각자의 특이한 궤도를 따라(Singularity)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빠져나오며 파도 물결(Multiplicity)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밖으로 향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몸체 안쪽에 머물고 있는 하나의 다양체를 깨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수미! 샤샤 발츠(Sasha Waltz) 무용단의 <노바디(noBody)> 작품에 참여했을 때, 스웜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재미없었다고요? 렉쳐에서 한 그 말이 자꾸 생각나요. 저는 스웜에 매료되었거든요. 몸들 사이를 이행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문턱 너머의 세계에 말이에요. 제 몸은 걷는 것에서 시작해서 바닥을 기었다, 공간을 가로질러 달리다 어느새 무리가 되어 있었어요. 무리로의 전이! 말 그대로 닫힌 개체가 아니라 열려있는 몸을 경험한 거죠. 게다가 토마스 하우어트는 앞에 선 사람의 위치와 순서가 변함에 따라 리더와 팔로우의 역할이 빠르게 뒤바뀌는 과정을 가리켜 민주주의적 프로세스라고 하더라고요.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인 가운데, 공동으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요. 이렇게 즐거운 민주주의라니요. 

맞아요. 편지에서 당신은 말했어요. ‘내적 충동과 외부의 자극 사이에서 발생하는 움직임, 혼자이면서 함께하는 것’에 우리가 흥분했다는 사실을요. 동시에 ‘그 움직임 안에서 있어야만 하고 아직은 모르는 불안정의 시간과 공간에 몸을 맡기는 불안-믿음의 감각’이 상상이 되냐고 물었죠. 답하기에 앞서 이번엔 질 들뢰즈(Gilles Deleuze), 펠리스 가타리(Felix Guattari)의 《천개의 고원》에 나타난 어느 마법사의 회상을 인용해 볼게요. 

“음악에 고유한 음악적 내용은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를 통과해
가지만 악기들과 관련한 온갖 종류의 영향 아래에서, 차츰 분자되기를 향해 나아가며, 드디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하고 지각 불가능한 것을 나타나게하는 일종의 우주적인 찰랑거림 소리 속으로 나아간다. 노래하는 새가 아니라 소리 내는 분자인 것이다.”
-《천개의 고원》, 472p

저는 특별할 게 없는 몸입니다. 그렇기에 시몽동(Simondon) 그리고 들뢰즈가 말하는 전-개체적(Pre-Individual)인 세계, 그 눈부신 익명의 세계로 더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거예요. 어쩌면 훈련된 무용수의 몸은 달랐겠죠. 당신에겐 통과해야 할 또 다른 관문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해 봅니다. 노래하는 새가 소리 내는 분자가 되기까지! 바로 서렌더(Surrender), 내려놓음이요. 불안과 예측할 수 없음에 몸을 내어 맡기는 과정이, ‘아무’ 몸보다 무용수에게 더 어려웠을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어코즈(Accords)>에 매료되었던 건 그 속에 무용수의 나르시스적인 표현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기교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몸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 불리는 질서와 시선을 배반하고 정형화된 형태에서 미끄러져 나와 탈주선을 그리는 몸짓을 볼 때마다 제 안에서도 엄청난 자유와 기쁨이 번졌던 겁니다. 

어쩌다 보니 새떼 타령이 좀 길어졌네요. 저희 집 앞 호수공원에 사는 백조 가족 기억하시죠? 해마다 백조 커플이 사랑을 나누고, 알을 품고 부화시켰다가, 새끼들 비행 연습을 시켜 날려 보내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작년엔 일곱 마리, 올해는 여섯 마리 새끼가 나왔답니다. 걸음을 멈추고 새끼백조들의 비행을 바라보곤 합니다. 앞에 선 새가 주도(Initiate)합니다. 모였다 흩어졌다, 엎치락뒤치락,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비행을 변주합니다. 물 밖을 나올 때 뒤뚱거리던 그 커다란 덩치가 하늘을 날고 있다니 믿기지 않지요. 호수 위로 몇 바퀴 돌더니 한 백조가 먼저 물 위로 내려앉습니다. 그러자 다른 백조들도 따라 내려앉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새들이 혼자 날 때보다 무리 지어 날 때 더 빨리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덕에 스웜 모델이 경제, 미디어, 군사 시스템 같은 데까지 적용되기 시작한 거죠. 중앙통제시스템이 아닌 자발적 자기조직 역량의 잠재력에 주목하면서요. 그렇다고 저까지 효율성을 힘주어 말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힘이 부족해 먼저 내려앉은 그 새끼백조가 그룹 전체를 리드하는 겁니다. 중도포기, 탈락, 낙오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이니세이트(Initiate)가 되는 의미의 반전을 목격하게 된 거죠. 팬데믹으로 자주 접해 온 “아무도 뒤에 남겨두지 말라(Leave no one behind)”, 이 말의 의미를 백조들이 상기시켜 준 셈입니다.

당신의 편지를 받고 잠을 설쳤습니다. 여담인데요. 저희 동네 어귀 아틀리에를 운영하던 독일 친구의 이름도 수미입니다. 수미는 말합니다. “어제는 잠이 오지 않았어. 보름달이 뜬 날에는 예민해져서 잠을 잘 수 없거든.” 그날 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은 아직 반도 차오르지 않았더라고요. 그러니 사랑스러울 수밖에요. 8월 중순이니 어느 밤인가 별똥별 무리가 나타났을 겁니다. 페르세우스 유성우(Perseid Meteor Shower)라 불리는, ‘무엇을 만지고 어디로 만지는지’ 모를 당신의 ‘고장 난 몸’을 상상하며, 오늘도 볕과 그늘 사이에 정수리를 걸치고 나무 그림자 윤곽을 따라 걷습니다. 숨을 쉬듯 나무가, 그림자가, 걸음이 흔들립니다. 바람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살갗(주름,  구멍,  털, 틈) 그 안쪽과 너머의 질감에 집중해 봅니다. 그러니까 무용수의 분자-되기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별똥별이 쏟아졌나 봅니다. 어제도 잠이 오지 않은 걸 보니. 밤잠을 설친 건 분명 우주의 찰랑거림 때문이었겠죠.

2021년 8월의 한가운데
별이 쏟아지는 밤
베를린에서 상화가

상화에게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곳…
춤에 대해서 함께 얘기를 나눌 사람이 되어…
디-콜로니얼(De-Colonial)담론과 실천을 다룬 ‘애프터 유럽’에서 나와의 만남을… 
그 기억을… 지금은…
그동안까지 시간을 경험을 의미를

지난번 상화 편지의 첫머리는 나의 미간을 움직였어요. 그리고 지금 그 제목을 다시 상기하며, 오후에 찍혀진 사진 속 이미지를 보며, 무심히 움직이는 미간을 감각 중이에요. 

‘혼  자  서  는  갈  수  없  는  곳’ …

사진 속 이미지는 촉촉해진 북한산 인수봉이에요. 꽤 자주 보는, 그리고 꽤 좋아하는 큰 돌이에요. 오늘 아침에 산책할 때는 비를 막는 우산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서울은 오랜만에 비가 내리고 있고, 어제까지는 여름 내내 뜨겁고 건조하기만 했던 날씨에 그 큰 돌의 표면은 매우 건조하고 거칠었는데, 빗줄기가 잠깐 멈춘 사이에 구름 사이로 드러낸 그것이 좀 다르네요. 갈증이 풀렸는지 빗줄기에 숨을 쉬는지 촉촉함이, 잔잔한 그 숨이 나에게까지 전달되네요.
(지금은? 누가? 내 주위에서? 어떻게…?)

어찌 보면 그때 그 만남 이후의 상화는 나와 춤을 함께 추지 않아도, ‘춤에 대해서 함께 얘기를 나눌 사람으로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의 수미는 우리의 춤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불거져 나온 상화의 예민한 언어들의 근막을 만지고 있어요. 특별한 것을 허락받은 것 같아요.’ 난 상화를 만져본 적이 없지만, 왠지 그 이상 가까운 느낌이에요.

사라질 듯 연약한 언어들을 만지며 그들만의 움직임을 느껴요. 그 움직임은 의미로 다가와요. 그리고 나는 그 의미를 나의 목구멍 안에 갇혀있는 목소리로 되뇌어요, 침묵으로 하는 이 열띤 논쟁의 다이내믹에 나의 얼굴은 상기돼요.
그리고는 언어들의 만짐과 논쟁하는 침묵 사이에서 꼼짝할 수가 없어요.
얽혀 있어요. 마치 언제나 내게 있었던 것 같은 연속적인 마주침 같이…
그런데
이  느  ㄲ  ㅣ  ㅁ 이
길게 느껴져요!
어떠한 얽힘의 공포에 휩싸이는 것 같아요!

의미와 느낌에서 헤매고 있는 이 와중에 손가락은 또 무심히 움직이고 있네요.
좀  더  상화의 말을 씹어봐야겠어요.
‘타  자  들  이    당  신  의    잠  재  를    선  물  받   을   때…’ 이 말이 기분이 좋아요!

상화, 내 몸이 춤을 출 때는 매 순간마다 타자(비인간, 시간, 공간 포함)와 관계하고 있어요. 주변이라는 영향권 안에 있거나 영향력에 대하여 예민해지거나 하죠. 그리고 난 그때, ‘관계’ 안에서 약간은 상기되는 흥분을 즐겨요. 

그 몸은 ‘내 것이 아니에요’—-
난—- ‘그때의 몸과 함께해요’ 

춤을 출 때 몸은 내게만 속한 것이 아니에요.심신 이원론이나 분신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함께 할 때’의 몸이 시시때때로 변하는 느낌 때문이에요. 알약이 되기도 하고, 케이크, 바람, 5살 소녀, 굶주린 개, 남자의 몸이 되기도 해요. 난 여기서 굳이 들뢰즈의 ‘되기’를 돌아보지 않아도 내 이성이나 관철이 나를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를 느껴요. 그것이 아니라면 자유로운 내가 또 있어요. 초를 다투면서 일어나기도 하는 ?어느 때는 ‘이상한 감’으로, 어느 중간이기도 하고 어느 때는 길냥이가 되는 ? 기분이기도 해요. 상화가 보았던 <퀴어링 보이스>에서는 철판의 말 없음이기도 하고, 철판 껍데기의 작은 떨림이기도 해요. 그런가 하면 목구멍 안의 습하고 팽팽한 공기를 딱딱 때리는 목젖이 철판이 되기도 해요. 그리고 터져 나오는 소리는 비명(Scream)이기도 해요. 너무나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라서 언제 어디서 소리가 생성되었는지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난 몰라요.

자전거를 타고 베를린의 폴크스뷔네(Volksbuehne)에서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쪽 사거리의 신호에 걸린 이야기를 좀 할게요. 신호에 걸렸다가 동시에 출발하려는 수많은 자전거들 사이에서 내 두 눈은 앞에 교차하는 차들을 보고 있지만 몸은 귀가 되어 주변을 듣고 있곤 해요. 그리고 그 찰나! 신호가 바뀌는 순간! 엉덩이를 들고 페달을 밟는 순간 꽤 빠른 속도로 쌩~~~. 약간의 상기됨. 서로가 서로를 지나침. 그것이 los fahren(출발)!

여기서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인가요? 언제의 나는 어떤 나였을까요? 이 순간 이후의 선택은 누가 하나요?

그때의 내가 그리고 지금의 내가 여전히 주목하고 있는 정동(Affect)은… 이 언어가 이리도 내 주변을 맴도는 건 이 상기됨이 연속되기 때문인데…

즉접 ——–
수평적 관계
——– 동맹을 늘려라

내가 아마 정동(Affect)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암스테르담 Master‘s Program – Das Choreography를 시작하고는 말을, 영어를, 철학을, 이론을, 담론을, 논쟁을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쏟아내고 싶은 소리들이 마구잡이로 안과 밖을 오갈 때… 소화하고 싶었어요! 그 모든 말과 생각을! 정말이지 듣는 순간에 꼭꼭 씹어서 삼키면, 맛은 몰라도 소화된 후 영양소가 되겠지! 내가 찾지 않아도 몸에서 저절로 힘으로 되어 나오겠지! 그렇게 만들고 싶었어요. 근데 이것들은 그냥 빈창자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 ‘소화’ 안에는 마치 내 입안의 침처럼, 위의 점액처럼 내 몸 안의 벽에 딱 붙어있는 어떠한 것들이 있더라고요. 문화, 믿음, 습관, 주관 등 어떤 상황과의 마찰에서 지속적으로 밖으로부터 오는 영향과 움직임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사회라는 이름으로 혹은 클래스, 자란 환경, 여자로 불리는 것, 도시/농촌, 아버지라는 것, 어머니라는 것과 함께 생성된 <나 안의 나>로 오늘 – 이 시간 – 가변적 결정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이때 체화(Embodiment)을 배웠고, 탈식민지화(Decolonization)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만나지는 타자의 것들과 섞이면서 다문화(Multicultural)를 소화하며 힘으로 소환해내려고 하면서 번역/변형(Translation/Transformation)를 만났어요. 물론 그중에는 소화가 힘든 무거운 것들도 있고, 가볍게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것도 있어요. 이    모든     복잡한    상황으로부터    하이브리드/퀴어/트랜스(Hybrid/Queer/Trance)를 다시 만나고, 마주치는 만남 안에서 즉접(Immediacy)이 만들어내는 창발적인 사건, 그리고 그 안에서 한없이 ‘무력한 나의 가능성’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반복적인 가변적 결정이 나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범주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거죠!
그런가요? 

21년 전 한국을 떠날 때 예측할 수 없음에 노출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상기되었고, 지금은 그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모르는-살아가는 감각이 익숙하고, 익숙하다 못해 꽤 괜찮기도 해요. 그리고 이것을 꽤 철저하게 무장된(?) affect를 따라가며 나를 보살피고 있는데, 만나는 사건들의 규모와 강도 역시 어떨지 모르겠어요. 깜깜해요. 그런데 그 주위가 암흑이에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나의 몸의 범주만을 감각한다. 어디로 움직이든 이 몸은 나와 함께 한다. 상화도 있다. 암흑에서 보이는 것은 만져지는 것은 진짜다. 상화 역시 그 암흑에 있다. 다른 것도 있다. 그것도 진짜다. 그것도 암흑에 있다. 만진다. 만남이 더 강하고 찐할 때도 있다. 그 때 내 몸은 전율도 한다. 이것도 진짜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을 때도 있다. 보이지도 않는다. 역시 내 몸이 전율한다. 이것도 진짜다. 암흑이 진짜다… … … 

발뒤꿈치의 둔한 부분을 콕콕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엑스터시가 느껴지는가 하면 매우 연약한 알몸으로 웅크린 내-등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기도 한 여러 심상도, 손바닥에서는 땀만 느껴지는 그 어떠한 것도 실제로 날 깨우는 촉매들이에요. 이 사건들은 보이지 않는 암흑에서 왠지 다 똑같은 것 같고, 왠지 동료 같아요…
그런가요? 

2021년 8월의 한가운데
동료 상화에게 수미가

p.s 에린 메닝(Erin Manning)은 ‘정동은 형성 중인 경험을 설명하는 한 방식’으로 ‘생성 중에 있는 직접적인 간극들 속에서 경험치(the stake of experience)들이 어떻게 발생하는 것에 주목한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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