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화 × 장수미 공개 편지: 우리는 정동 속에 있다 ➂

세 번째 편지

수미에게

안녕하세요, 수미!

수미의 편지 속 그곳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흙냄새가 일면서 투두두 빗줄기가 떨어집니다. 사람들이 떠나자 공원은 소리로 색으로 물기로 가득 찹니다.

8월에 열리는 베를린 축제, 탄츠임아우구스트(Tanz im August)가 마무리됐어요. 포스트휴머니즘을 주제로 한 공연 <아키펠(ARCHIPEL – Ein Spektakel der Vermischungen)>을 보러 마할라(MaHalla)로 향합니다. 처음 들어보시죠? 내년 2022년 오픈을 목표로 폐허였던 발전소 부지를 예술공간으로 바꾸고 있는 곳이에요. 트램 노선을 따라 낯선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러자 탈것에 실려 새로운 곳에 당도하던 여행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시작인지 모르겠으니 어디가 가장 멀리 간 곳이었는지 그것도 잘모르겠습니다. 다만 사하라 사막에서 보낸 며칠은 세상의 끝에 와 있는 것만 같았어요. 아마도 적막함 때문이었을 거예요. 몸에 도포를 둘둘 말고 모래 위에서 잠을 청했지요. 머리카락 사이사이 쌓여가는 모래와 사막의 한기에 자꾸만 눈을 뜹니다. 눈앞으로 별들이 쏟아지죠. 떨어지는 별의 수를 세다 다시 잠이 듭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그 순간은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습니다.

조용한데 소리로 가득 차는 경험, 몇 주 전 훔볼트하인(Humbolthain) 공원에서도 그랬어요. 안무가 이자벨 샤드(Isabelle Schad)가 초대한 페스티벌에서였지요. 저는 이자벨 샤드의 공연을 볼 때마다 ‘너무 좋다! 옷을 입고 벗는 동작만으로도 춤이 될 수 있구나. 움직임을 지속시키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몸 자체구나. 나도 춤의 일부가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요. 몸의 행위주체성(Agency), 주체적인 형상(Subjective Form) 이런 개념들이 절로 이해가 되고요. (철학자 화이트헤드(Whitehead)가 말하는 ‘Subjective form’은 주로 ‘주관적인 형상’이라 번역되지만, 몸과 주체, 사건과 주체, 형상과 정동의 관계를 생각할 때 저는 그것을 ‘주체적인 형상’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공원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몸을 흔들어 털고, 걷고, 마주치는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오픈 프랙티스 세션이 진행됐어요. 이어서 회전춤, <터닝 솔로 2(Turning Solo 2)>가 이어집니다. 불과 일주일 전 극장에서 봤던 공연이네요. 우리는 나무들 사이로 둘러앉았어요. 그 너머에는 공놀이하는 아이들, 아크로 요가 하는 무리들, 타이치(Tai chi) 하는 사람들, 소풍 나온 사람들, 저마다의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더라고요. 그 옆에 무심하게 서서 두 댄서가 돌기 시작합니다. 돌고 돌고 돌고, 안에 입은 옷을 벗어 다시 바깥으로 껴입고, 옷으로 바람 주머니를 만들고, 옷을 동그랗게 공처럼 만들어 서로 맞바꾸고… 이 모든 걸 계속 돌면서 하더라고요. 관객이 만든 작은 울타리 안은 고요해졌어요. 그러자 퍽! 공차는 소리, 마마! 엄마 부르는 아이 소리,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나부끼는 소리… 주변의 온갖 소리가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저는 렉쳐에서 콜렉티브 아티스트 그룹 리그나(LIGNA)의 라디오발레 <제어스트로이웅 위버알(Zerstreuung überall)>과 라이문트 호게(Raimund Hoghe)의 춤이 보여준 멈춤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춤에 나타난 멈춤은 팬데믹과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위기 속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었지요. 무용학자 안드레 레페키(Andre Lepecki)는 정지행위(Still-act) 안에 증폭되는 진동과 떨림을 강조하며 느림을 존재의 속도와 강도라고 표현했어요. 인류학자 세레메타키스(Seremetakis)를 인용하며 시간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역사를 심문하는 행위라고도 했지요. 애도와 돌봄의 실천으로서 멈춤에 대해 생각합니다. 멈출 수 있음 자체가 특권임을 알기에 이내 또 주춤합니다. 하지만 분명 어떤 공연은 시간이 늘어나는 경험을 하게 하죠. 경제성의 시계에서 풀려나, 시간을 선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공간 안에서 타자를 기억합니다. 

제가 멈춤을 강조하자, 장혜진 안무가는 ‘계속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애도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는 안무가들의 실천’을 상기시켜 줬어요. 무용수들의 계속되는 터닝(Turning)과 함께 그 생각이 맴돌았어요. 그리고 두 댄서의 터닝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는 작년 가을 한강공원이며, 덕수궁 돌담길에서 춤을 추던 수미를 떠올렸어요. 안무가 마텐 스펭베르크(Mårten Spångberg)의 <그들은 야생에 있었다>라는 공연이었죠. 수미, 당신은 왜 춤을 추나요? 마텐 스펭베르크는 익명이 되기 위해 춤을 춘다고 하더군요. 인상적이었어요. 그것은 제가 여행을 하는 이유와 닮았거든요. 

이쯤에서 실패담 하나를 고백할게요. 저는 여행기를 책으로 낸 적이 있어요. 터키와 그리스 여행기였죠. 그 안에는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박물관>이 아래와 같이 등장해요.

“사실 나는 소설 속 주인공 케말이 사랑한 퓌순보다 그의 약혼녀였던 시벨을 더 좋아했다. 화자인 케말은 종종 그녀의 속물근성과 이중성을 꼬집곤 했지만, 아래와 같은 표현에서 나타난 그녀의 생각은 단박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벨은 자임에게 우리만 아는 별명을 붙였다. ‘그것은 당신은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어요! 자임.’이었다. 그녀는 멜템 사이다의 광고에 나오는 이 카피가 무척 의식 없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젊은이가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며 서로를 죽이는 터키같이 가난하고 고민 많은 나라에서 이 말은, 시벨에 의하면 추한 것이었다.”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어요’ 식의 광고 카피가 쏟아질 때마다 저는 시벨의 마음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제 책에 달린 제목이 바로 <산토리니, 주인공은 너야>입니다. 이 모순을 어쩌면 좋지요? 그것은 세상을 다 가져라, 같은 자기중심적 주체의 확장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상처받은 속내를 달래준 반응도 있었어요. 장강명 작가의 한줄평처럼요. “도전기도 자아 찾기도 아닌,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무엇도 되려고 애쓰지 않는 성숙한 방랑” 그것이 성숙인지는 모르겠지만, 길 위에 서는데 여행 그 자체 말고 무슨 또 다른 목적이 필요할까요.

언어도, 상상도 모두 오염되었다면, 열심도, 몸부림도 모두 자본과 시스템에 포획되었다면, 우리는 어디로 다음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걸까요? 이 춤 공부는 저를 멈춰 세웁니다. 정해진 흐름에 저항하고 심문하는 행위로 저는 지금 멈춰 서 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수미! 당신을 여행하는 동안.

2021년 8월을 보내며
베를린에서 상화가

상화에게

오늘 난, 예술-삶의 혼돈의 상태를 상화에게 털어놓고 싶어요!

상화, 지난 며칠 동안 춤-리딩-그룹에서 읽을 보야나 스베이지(Bojana Cvejic)의 ‘Theatrical Apparatuses of Disjunction’의 도입 부분을 번역해 보았어요. 이 부분에 언급되는 내용을 보면, 극장이 만든 관객과 무대의 분리 역사에 대한 그리고 이것을 깨는 동시대 안무가들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는… 나는 그 극장의 계약관계를 생각하며, 나의 동공에 그려지는 많은 기억 속의 눈들을 떠올려 보아요. 공연이라는 이름 아래 무대에서 만났던 눈들, 우연한 마주침의 눈들, 줌 화면 너머에서 매우 작은 떨림이 있었던 상화의 눈도 옛사랑의 떨림의 눈도… 어쩌면 <게이즈(Gaze)>에 대한 나의 집착적 리서치가 왜 있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오랫동안 ‘이거야! 관객(타자)과의 소통의 도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나는 어떠한 감정의 움직임, 그것도 매우 작은 사적인 감정의 흐름과 함께 가는 것을 은근 즐기는 것이었네요…

‘a journey with your micro world’ 

이건 사담인데요, 2018년의 에린(Erin Manning)이 그러는데 브라이언(Brian Massumi)은 ’inter-’라는 말에 대해 강박적 반응을 보인다고 해요. 후후! 어련하겠어요! 평생을 사유하는 ‘그것’일 테니! 왠지 ‘inter-’ 와 ‘강박’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들과 긴장(Intension) 역시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왠지 이들 모두를 흔들어 부숴 버려도 이들은 하나의 전자의 힘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왠지 벗어날 수 없는 ㅃㅉㅉ직 ㅃㅉㅉ직 ㅃ—ㅅㅉㅃ—ㅃ-ㅉㅉ-삐ㅃ-ㅉ-ㅉㅂ삐ㅉ직 같은 거요. 브라이언 마수미는 ‘정동’은 두뇌의 아래에 위치한 곳인 언어와 인식영역이 아닌 그보다 빠른 영역에서 작동한다고 했죠!

Subconscious sphere reached through the tempo or more through the rhythm.
Outside rhythm that controls my inner rhythm.
Fragility and sensibility overcomes an ‘inner — censor’, that is a feeling of comfort
and agreement
2017
sumi <scream es-say>
<스크림 에-세이>에서 전 관객의 눈을 보며 대화를 하죠.
‘practice into your voice’ 
기억하자면 할 수 있는 위의 문장들을 종이에 써 놓고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아요. 그냥 읽어요. 애써 기억하거나 생각하려 하지 않는 상태 -그 순간에 있는 상태- 에서 그냥 읽어 내려간 문장의 단어들을 그저 다시 반복해요. 관객 앞에서. 천천히 말해요. 또 반복해요. 아주 쉬운 안무죠.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정해져 있는 것은 아주 미약한 부분이에요. 그래야 내가 관객과 ‘inter-’의 상태로 들어가니까요.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기대하거나 계획할 수 없는 상태. 어떠한 비어있는 상태, 작동만 하는 상태, 지속적인 튜닝(Tuning)의 상태는 관객에게로 돌아가죠. 관객은 나의 비어있는 틈으로 혼란을 겪고, 관객의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고, 극장적 계약관계는 깨지고, 퍼포먼스에 빠져드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거나 느끼는 능동적 자신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죠. 제가 생각하는 ‘정동’에 의한 가능성은 이렇게 ‘inter-’의 형태가 돼요. 보야나 스베이지가 관객으로 있었다면 어떻게 여기에서 공연의 ‘장치’를 말할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그 ‘장치’에 ‘정동’은 어떻게 자리할지 궁금하네요.

2015년 <스크림>을 리서치 해야겠다고 생각한 때, 이 ‘하나의 행동(Scream as an Action)’이 리서치의 주제가 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어요. “그래, 그냥 몸이 하는 거에 질문하는 거야! ‘스크림’이라는 목소리이자 행동 안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복합적 현상들을 발견해보면, 몸이 하는 거에 대한 경험적 이해가 올 거야.” 물론 작은 일은 아니었어요!

이즈음이 복싱 트레이닝을 시작했을 때예요. 전 매우 매우 근육을 갖고 싶었고, 또 그 근육질이 만드는 움직임을 다시 감각 안에서 느끼고 싶었어요. 왠지 어릴 때 흉내 내던, <록키(Rocky)> 영화에서 주먹질을 신나게 하며 음악을 흥얼거렸던 걸 상기하면서 복싱 클럽을 찾았죠. 프라이부르크에 살 때였는데, 이후 많은 다른 복싱 클럽을 다녔어도 이만한 곳은 없었던 것 같아요. 작고 단단한 몸집의 터키 남자가 트레이너였는데, 교수법이 소위 ‘내츄럴(Natural)’이었죠. 그는 저에게 “앞에 맹수가 있어. 너는 그렇게 가슴을 펴고 있을 거야? 웅크려야, 눈을 살피면서 직시해야 맞지 않지!”라고 이야기했어요. 전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몸짓을 배운 거죠. 그리고 그 두려움에 반응하는 펀치를 하며 ‘화가 남’과 비슷한 ‘방어의 감정’을 느꼈어요. 그래도 여전히 ‘타인을 친다’는 건 할 수 없었어요. 여자아이> 여자로 살아온 역사 안에 없던 감정-상태-행동이었던 거죠. 어느 날 그룹 트레이닝에서 한 독일 여자랑 파트너로 연습을 하는데, (나름대로 무용수이니 접촉 즉흥이나 듀엣을 통해 익힌 기술에 의존하면서 펀치는 당하지 않을 거야. 상대방의 몸과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 훈련된 상태잖아!라고 생각했어요) 한순간에 그녀는 나에게 펀치를 날렸고, 난 한 방 먹었죠. 그녀의 힘 그대로, 날 것 그대로의 액션에 정신이 바짝 들면서 화가 나더군요. 평소에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나는 펀치를 날릴 수 있었어요. 화가 나서가 아닌, 그냥 움직임 기술에 의해… 다이내믹에 의한 반응으로… 그렇게 펀치를 날리고 나니 상대방은 화가 났어요. 그리고 나는 ’펀치 하는 행동에 화가 나는’의 몸-감정, 그러나 정말 화나지 않은 그런 상태에 있었어요. 이 순간 몸은 나에게 ‘공격적이라는(Aggressive)’라는 말을 하고 있었어요. 화남과 비슷한 느낌이었죠. ‘욱한다’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역시 나는 사실상 화가 나지도 욱하지도 않았어요. 다만 그 비슷한 감정의 움직임, 어떤 사람에게 펀치를 날리는-전-후의 정동의 현상에 잡혀 있었어요. 그러고는 ‘남자 같다’라는 생각을 했죠. 여자라 이름 붙인 역사에서는 없던 감정과 행동 상태. 그때 당장은 전형적 레퍼런스에 의해 남자가 떠올랐는데, 이후에 따라오는 것은 ‘같구나’라는 열린 상태. 제가 생각하는 ‘정동’은 이렇게 정체되었던 역사에 변화의 시각을 던져요.

이 비슷한 경험은 작품 <튜닝>의 리서치 과정에도 있었어요. 소리를 막 지르는데 눈앞에 92년의 흑석동 중앙대 정문 앞길이 떠오르는 거예요. 데모 소리와 화염병에 의해 뿌연 공간, 쾌쾌해지는 목과 눈, 숨을 쉴 수 없고, 정신없이 뛰고 몰리는 사람-떼… 이러한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소리 지르는 것이 그 군중의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때의 나…
소리가 기억을 기억의 이미지가 감정을 감정이 그 시대의 정치를 그것에 대한 나의 반응은 아주 커다란 몸과 소리를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데, 이러한 공동의 감정이 정동에 의해 몸에 저장되는구나’ ‘사회란 내가 살아 온, 살아가는 사회란, 이런 흔적과 궤도구나. 감정은 나에게 속한 것만이 아니구나.’ 이러면서 사라 아메드(Sara Ahmed)의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을 들여다보게 되었죠. 

embodied cognition
It happens pre-cognitively out side of thinking, outside of language. 

심장이 먼저 뛰고 가슴부위가 긴장되면서 숨이 차지죠. 당연히 목소리도 떨리고, 생각마저도 잘되지 않아요. 난 이런 기억이 많아요. 섹스도 마찬가지예요. 몸이 진동하기 시작하고, 피부를 느끼고, 온도와 촉감에 의해 몸은 변화로 가는 진동을 해요. 눈앞에는 여러 색깔의 공간이 지나가거나 어느 순간 몸의 깊은 곳에서 수축 혹은 강한 팽창, 이완이 복합적으로 일어나죠. 이럴 때 “사랑해”는 입 밖으로 흘러나오죠. 섹스, 사랑 매우 ‘Intra-’적이죠. 몸이라는 이런 몸, 전-객체(Pre-Individual)의 몸들이 수시로 만나고 있는데, TV 속 멜로 드라마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브라이언 마수미는 정동(Affect), 느낌(Feeling), 감정(Emotion)을 분리해요.
정동과 감정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해요.
‘너는 사자를 본다.
너는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너의 몸이 움찔하며 떨고 있기 때문이다.’‘너는 사자를 본다
너의 몸이 움찔하면서 떤다.
너는 너의 몸의 양상을 인식하면서 이것을 두려움으로 간주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말을 –‘인텐션(intention)’, ‘텐션(tension)’의 움직임, ‘tension’에서의 여운, ‘tension’에 의한 ‘릴리즈(release)’가 감각되는 현상, ‘release’를 인식- 이라 하면 사랑도 몸-감정-가능성으로 인식하지 않을까요? 여러 층위의 사랑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정동은 몸과 현상의 관계로 열 수 있는 가능성을, 그리고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커다란 부분이에요. 삶도 예술도 사랑도 한순간이 사라지며 생성시키는 연속성 안에서 혼자가 아닌 여럿 중 하나라는 머릿속 그림이 컴퓨터와 바로 옆의 커피향을 머금고 있는 머그컵의 손잡이를 다시 보게 하네요!

pre-social individual
pre-individual
post-individual

‘나는 죽은 몸을 보았다. 나는 슬퍼한다. 왜냐하면 나의 몸이 차갑게 굳은 사체로부터 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죽은 몸을 본다. 나는 나의 몸이 차갑게 굳은 사체로부터 전이 된 차가움과 굳음에서 슬픔을 인식한다.’ 

위의 문단은 2017년 아버지의 죽음 시기에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만난 살아있지 않은 아버지의 몸과의 경험이에요. 난 울지 않았어요. 눈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소리도 내지 않았어요. 소리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어떤 이는 이를 공감(Empathy)이라 이야기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나는 이 순간 눈물 나지 않음과 울지 않음과 전율하지 않음과 소리 내지 않음의 슬픔을 경험했어요. 이 경험은 나에게 슬픔을 해석하게 하는 한 형태였죠. 

2018년 작업 <Dead-body Being>공연에 온 관객들은 소리 내지 않음과 전율하지 않음의 시간을 함께 보내요. 퍼포머가 49일간의 애도를 훈련하는 자화상의 모음을 보죠. 어떤 관객은 지루함을 그 어떤 이는 생각할 시간을 선물 받죠. 매우 조용하고 작은 시간들은 ‘지루함’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지만, 이 지루함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되기도 하죠. 미시적 원동력을 찾는 이유이기도 해요. 우리는 안무에서 어떤 기대를 하나요? 미시성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잖아요, 움직임으로 누구나 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 하나가 되느냐! 작을수록 그 역량은 더 많음을 필요로 하겠죠!

몸은 그 자체의 지식이 있다. 이 지식은 근육과 신경의 기억, 인지와 인식에 의해 저장이 된다.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각각 다른 형태와 질의 몸을 갖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부터 온다. 우리의 세상을… 궁금하지요? 9월이네요, 곧 한국에 온다고 했죠!! 이젠 만나서 얼굴 보면서 정동과 함께 얘기할까요!

너를 기다리며…

2021년 8월을 보내며
서울에서 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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